시합풍경

비인기종목 싸이클....베이징올림픽 비하인드 스토리

레오 ™ 2009. 5. 11.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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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올림픽이라면 꽤나 지난 얘기입니다 이미 읽으신 분들도 계실테고.....비인기종목인 싸이클경기이기에 접하지 않으신
많은 분들을 위해 글 올려 봄니다



"나는 꼴찌가 아니다"
박성백│사이클 남자 개인 도로│88위
4바퀴를 돌았다. 이제 세 번만 더 돌면 레이스는 끝난다. 8월 9일 박성백(23,서울시청)은 남자 개인 도로 경기에 출전한 143명의 선수들과 함께 힘차게 페달을 밟고 있었다.

톈안문광장을 출발해 베이징시 외곽을 거쳐 만리장성을 넘는 구간이 포함된 23.8km의 코스를 7바퀴 도는 245.4km 코스였다. 박성백은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봤다. 수많은 선수들이 자신의 뒤로 줄지어 달리고 있었다.

“거기서 ‘레이스를 그만 둘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더 이상 달려 봐야 제 앞에서 바람막이를 해 줄 선수도 없었고요.”
8월 19일 경북 영주시 풍기읍에 있는 경륜훈련장을 찾았을 때 박성백은 올림픽을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사이클 선수들은 레이스를 할 때 무조건 앞으로 치고 나가지 않는다. 장거리를 달려야 하는 도로경기는 더욱 그렇다.
같은 팀 선수끼리 작전을 짜 상대 선수들을 적절하게 견제하면서 달린다. 페이스메이커 구실을 하는 선수가 반드시 필요하다. 박성백은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달렸다.



혼자 달려야 했던 이유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남자 개인 도로 경기에 제가 처음 자력 출전을 했다고 화제가 됐는데 사실은 서글픈 얘기입니다. 베이징올림픽에 가지 않으려고 했어요.”
박성백은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대한사이클연맹과 대한체육회의 철저한 무관심 때문이었다.

박성백은 2006년 도하아시아경기 대회에서 주종목인 도로 경기에서 동메달을, 트랙에서는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러나 그때뿐이었다. 올림픽에서는 메달 가능성이 사실상 없어서 박성백의 출전에 대해선 조금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박성백은 대회 초반에 배정된 경기 일정 때문에 선발대에 속해 8월 1일 베이징에 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보조 사이클을 준비하지 못했다. 베이징으로 출발하기 전 장비를 먼저 보내는데 보조 사이클을 넣으려고 했다.
연맹에서는 짐을 부치는 비용이 빠듯하다며 박성백에게 경기용 사이클 한 대만 가져가는 게 어떻겠냐고 물어봤다.
그는 연맹의 지시를 따랐다. 다른 나라 선수들에게 따라붙는 마사지사나 트레이너 그리고 ‘매케닉’으로 불리는 정비 기술자는 박성백에게는 사치였다.
코칭스태프의 지원도 없었다. 박성백과 함께 베이징에 온 전제효(47) 감독은 다음날 여자 도로경기에 출전하는 손희정(21,상주시청)을 돕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

박성백은 8월 6일부터 8일까지 프랑스 선수 들과 같이 연습 주행을 했다. 프랑스 코칭스태프는 ‘박스카’에 타고 선수들을 자세히 살폈다. 프랑스 취재진은 선수들의 훈련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다.

프랑스 선수들과 박성백의 연습 주행 장면은 국내에서는 전파를 타지 못했지만 호주에서 방송됐다. 그 장면을 본 박성백의 매형이 누나와 어머니 김향옥(57) 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매형은 “처남이 올림픽에 출전했는데 응원을 안 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누나와 어머니를 설득했다. 어머니와 누나는 8월 9일 베이징에 와 태극기를 들고 박성백의 경기를 지켜봤다.



고비
“경기 시작 12시간 전에 ‘스타트 오일’을 발라 근육을 풀어야 하는데 이번에는 처음으로 그냥 출발했습니다. 선수생활 12년 만에 처음이었습니다.”

박성백은 오기로 경기를 시작했다. 올림픽을 준비하기 위해 지난 6개월 동안 이탈리아, 스위스 등에서 전지훈련을 했던 생각을 머릿속에 떠올리면서 페달을 밟았다.

처음부터 앞으로 내달렸다. 만리장성을 오르는 언덕 코스(10km)에서 다른 나라 선수들에게 추월당할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에 미리 정한 작전이었다. 그런데 사이클이 갑자기 흔들렸다. 50km를 달렸을 때쯤 앞 타이어에 펑크가 났다.

매케닉도 보조 사이클도 없는 상황이어서 눈앞이 캄캄했다. “다리에 힘이 풀렸습니다. 막막했어요. ‘6개월 동안 일주일에 1,000km를 달렸는데 여기서 경기를 끝내야 하나’라는 생각도 들었고 ‘그냥 이대로 반대 코스로 돌아가서 어머니와 누나를 만나 베이징 시내에서 쇼핑이나 할까’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때 어떤 동양인이 박성백에게 다가오면서 손을 흔들었다. 국제대회에 참가하면서 얼굴을 익힌 일본인 매케닉이었다.

그는 박성백의 사이클을 보고 상황을 알아차렸고 일본팀의 박스카에서 보조 타이어를 꺼냈다. 박성백은 일본팀 지원 스태프의 도움으로 다시 페달을 밟을 수 있었다.

“정말 고맙더라고요. 경기를 포기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거든요.”

새 타이어로 갈아 꼈지만 바퀴를 돌수록 선두권과 거리는 점점 더 벌어졌고 다리 힘은 빠졌다. 가장 힘든 코스인 만리장성 언덕길을 올라갈 때는 열기 때문에 머리가 터질 듯한 고통을 느꼈다.

다른 선수들은 머리 위에 얹는 얼음주머니를 지원 스태프에게 받았으나 박성백에게는 이를 건네 줄 지원 스태프가 없었다.

박성백은 경기에 앞서 마실 물 두 통을 준비했다. 다른 선수들은 경기 도중 물을 마시고 빈통을 버린다. 뒤따라오는 지원 스태프가 이를 수거한다.

그리고 경기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물통을 사이클에 매달고 주행하지 않는다. 무게를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다. 박성백은 물통을 챙겨 줄 지원 스태프가 없어 두 개의 물통을 매달고 경기를 했다.

“제 옆을 지나가는 다른 나라 선수들이 ‘저 녀석은 왜 물통을 매달고 주행을 하나’라는 눈빛으로 바라보더군요. 그 순간 부끄럽기도 했지만 ‘잊어버리자’고 마음먹고 경기에 집중했어요.”

박성백은 143명의 선수가 출전한 사이클 남자 개인 도로 경기에서 누구의 관심도 바디지 못한 채 외롭게 달렸다.
GETTY IMAGES/ Multibits.co.kr



완주
“마지막 한 바퀴가 남았을 때 내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았어요. 몸은 힘들고 ‘내가 왜 달려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포기할까’라는 마음도 있었는데 그때까지 달린 게 아까웠어요. 이번 베이징올림픽 코스의 원래 길이는 270km였는데 대회 개막을 앞두고 바뀌었어요. 여러 나라에서 코스가 길다고 불만을 터뜨렸거든요. 만리장성을 넘는 언덕 코스가 있는데 그곳을 달리면 선수들의 몸 상태에 지장을 줄 수 있다고 항의를 하니 베이징올림픽 조직위원회가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코스 길이가 줄어들었는데 그만 둘 순 없었어요.”

완주를 결심한 박성백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대회 규정상 선두로 달리는 선수와 한 바퀴 이상 차이가 나면 해당 선수는 레이스를 중단해야 한다.

박성백은 따라잡히지 않기 위해 속력을 냈다. 순위 경쟁은 이미 무의미했다. 완주를 하느냐 마느냐가 그에게 주어진 마지막 과제였다.

박성백은 7시간3분4초로 경기를 끝냈다. 출전 선수 143명 가운데 완주자는 90명이었고 박성백은 88위로 들어왔다.

“결승선을 통과하는데 1, 2, 3위 선수들이 시상식을 하고 있었어요. 선수생활을 하면서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습니다. 뭐라고 어떻게 표현하기 어려운 묘한 기분이었어요. 그전까지 제가 시상대에 서 있을 때 그제야 결승선을 통과하는 다른 선수들을 보면서 ‘쟤들은 뭐냐. 선수 맞나’라는 생각을 했는데 베이징에서 거꾸로 제가 그런 상황이 된 겁니다. ‘내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는 선수구나’라는 생각도 들었고. 이번 올림픽에서 잊을 수 없는 경험을 했습니다. 많이 배우고 돌아온 겁니다.”

시상대에서는 6시간23분49초의 기록으로 금메달을 딴 스페인의 사무엘 산체스(30)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박성백보다 39분15초 앞섰다.

스페인 국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박성백은 안장에서 내려 잠시 쉬었다. 이틀 뒤인 8월 11일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지만 반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2012년 런던올림픽에는 4, 5명 정도의 팀을 구성해 다시 도전해 볼 계획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나 다른 대표선수들이나 올림픽 출전 포인트 관리에 신경을 써야합니다.”



목표
“도하아시아경기대회가 끝나고 일본, 홍콩 사이클 관계자들에게 귀화 요청을 받았어요. 솔직히 흔들리기도 했습니다. ‘좀 더 좋은 환경에서 운동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으니까요.”

서울 덕산중 1학년 때 사이클을 시작한 박성백은 연맹 회장을 꼭 한번 해 보고 싶다고 했다. “제가 좀 고집스러운 면이 있는 걸 잘 압니다. 그래서 연맹에 있는 어르신들 가운데 말을 잘 안 듣는다고 저를 싫어하는 분들도 계시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런데 비인기 종목이라고 언제까지 무관심 속에 선수들을 내버려 둘 수 있나요. 이제는 대표선수들이 태극 마크를 부담스러워 합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성백의 외할아버지는 일본인이다. 박성백은 “외할아버지는 한국인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세요. 그래서 제게 다른 나라로 귀화해 운동을 계속하라고 얘기하신 적도 있습니다. 친할머니는 운동을 해 손자 얼굴을 자주 못 본다고 사이클 타는 것을 당장 그만두라고 하시고. 그렇지만 전 분명한 목표가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박성백은 이번 대회에서 최소한의 지원만 이뤄졌다면 88위보다는 앞선 순위를 기록할 수 있었다고 자신한다.

런던올림픽에서는 30위권 진입을 목표로 잡았다. 베이징에서 돌아온 박성백은 3일을 쉰 뒤 8월 26일부터 31일까지 열린 제9회 인천광역시장배 전국사이클대회에 출전했다.

박성백은 ‘꼴찌를 할 거면서 왜 올림픽에 갔느냐’는 문자가 아직도 친구들에게서 온다고 했다. 그러나 얼굴 표정은 밝았다.

“최하위는 안 했어요. 완주한 선수 가운데 뒤에서 세 번째였지만 부끄럽지 않습니다. 올림픽이라는 큰 무대에서 경기를 해 본 경험이 나중에 반드시 제 사이클 인생에 많은 도움이 될 거라고 믿습니다.”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박성백의 입가에는 웃음이 가시지 않는다.



선수촌 식당의 러브 스토리
박성백은 선수촌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기 어색해 평소 안면이 있는 펜싱 선수들과 함께 식당에 갔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식사를 하고 있는데 다른 종목의 한국 선수가 박성백에게 “펜싱 대표 선수냐”고 물었다.

사이클 선수라고 하자 “베이징에 사이클도 왔느냐”는 말이 돌아왔다. 박성백은 이제 이런 반응에 익숙하다.

그러나 선수촌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는 건 아직도 적응이 덜 됐다. 하지만 박성백은 이 덕분에 여자친구를 만나게 됐다. 도하아시아경기대회 때 박성백은 경기를 끝내고 선수촌에서 쉬고 있었다.

동료에게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춰 깨워 달라”고 얘기를 하고 잠을 잤다. 곤히 잠든 박성백을 깨우지 않으려고 동료 선수들끼리 저녁을 먹으러 가 버렸다.

뒤늦게 식당에 간 박성백은 구석 자리에 앉아 늦은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그때 한 여자선수가 “같이 저녁을 먹자”며 옆 자리에 앉았다.

말레이시아 승마 선수 디아니 리칭유(21)는 박성백의 목에 걸린 AD 카드로 이름과 국적을 확인했다.

박성백은 짧은 영어로 리칭유와 대화를 시작했다. 대회가 끝난 뒤에도 계속 연락을 주고받자고 약속한 두 사람은 3, 4개월에 한 번씩 만나다 친구에서 연인으로 발전했다.

박성백은 “만약 그때 동료선수들이 나를 깨웠다면 여자친구를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는 영어 실력이 제법 늘었다”며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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